찰스 터너는 어릴 때부터 들판에서 가족들과 일하곤 했다. 15살이 되던 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입을 줄이기 위해 나이를 속이고 군대에 입대했다. 실은 입대하려던 다른 사람을 따라가서 구경하다가 입대 심사관의 꼬득임에 넘어간 것이지만, 구멍 뚫리지 않은 양말과 물려받지 않은 깨끗한 새 속옷을 처음으로 입어보는 순간이었다.
낙하산 보병이 된 그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펼쳐진 그해, 1944년 여름에 18살이 됐고 강하 중에 넓적다리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사방에서 총 소리와 신음 소리가 난무했고, 다리 부상으로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낙하산으로 몸을 가리고 죽은 척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독일군 저격수는 그대로 속았고 그는 밤새도록 그 들판에서 동료들이 죽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의 어린 아내는 첫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프랑스에서 남편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한 나머지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을 남편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남편의 생존 소식을 들은 것은 이미 아이가 태어난 후였다.
아군에게 발견된 그는 다리를 잃은 프랑스 소녀와 함께 수레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뼈가 부러진 위치는 골반뼈 바로 아래였고, 의사는 그에게 앞으로 다시는 걸을 수 없으리라고 선고했다. 짧은 요양을 마친 그는 군수송기 안에 꽁꽁 묶인 채 미국에 도착했고 힘든 재활 과정을 거쳐 비록 부상을 입은 다리가 몇 센티미터 짧아졌지만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 제대 후 남부에 정착한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를 낳았다. 둘째 딸인 낸시는 로널드라는 남자와 결혼했고, 에밀리와 윌리라는 이름의 두 개구장이를 낳았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생존자 중 한 명인 그는 이제 많은 것을 잊었지만, 가끔 정신이 또렷할 때면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어느 날의 들판을 이야기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