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Log/Romance2018. 2. 12. 07:44

현재 반장님인 상태인 관계로 대부분 TTS로 읽었는데, 초반은 그럭저럭 무난했지만 뒤로 갈수록 전개가 별로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성의 레이디가 신분을 숨기고 낯선 남자를 고용해서 성애를 연습하는 초반부는 할리퀸의 정석을 따르며 진행된다. 여기까지는 말이 안 되긴 해도 무난한 편이다. 그런데 남주의 정체가 밝혀지고 성을 둘러싸고 갈등이 이는 중반부부터는 김구라 표정을 지으면서 기계적으로 페이지를 넘겨야 했다.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해 길다 싶은 분량도 문제다. 차라리 초반부의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나가 짧게 끝내는 게 완성도 면에서 나았을 듯하다. 여주에게 좀 엉뚱한 반전 매력이 있는데 남주는 할리퀸에서 오려다 붙인 종이 남주 스타일로 전형적인 마초이다.


글 앞머리에 "글에 나오는 지명이나 인물은 가상으로 실제 역사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라고 나와 있긴 하지만 이 책은 지명과 인물 이름을 실제 역사에서 빌려올 필요가 전혀 없이 애초에 로판으로 나왔어야 했다. 870년에 분리된 프랑크 왕국에 11세기 말에 건립된 윈저궁이 있고, 그 왕국의 왕은 헨리왕이며, 여주의 외할아버지는 스페인계인지 이름이 페르난도이고, 서브남주는 남주는 타타르 카잔 출신이지만 위화감 없이 섞여 들며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의 여신 이름을 자주 언급한다.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설정이다.


일단 완독은 하자는 의무감으로 꾸역꾸역 읽었다.


Posted by Finrod
Reading Log/SF & Fantasy2018. 2. 4. 17:33

나오미 노빅의 '테메레르' 시리즈를 읽다가 지쳐서 결국 포기했는데, 테메레르가 뭔가 몸에 잘 맞지 않는 옷과 같은 느낌이었다면 얼마 전에 완독한 신작 '업루티드'는 그야말로 작가의 몸에 찰떡같이 딱 맞는 느낌이다. 마녀와 마법사가 등장하는 판타지인데, 전작보다 캐릭터가 생생하고 세계관과 마법 설정이 꽤 참신하다.


'업루티드(Uprooted)'의 사전적인 의미는 뿌리가 뽑혔다는 뜻이다. 이 소설의 초반 배경이 되는 시골 마을은 사악한 숲(Wood: 책에서는 그대로 우드라고 번역됨)의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마을에 뿌리를 박고 태어난 주인공이 절대 뿌리를 내릴 생각이 없는 마법사를 만나서 모험을 펼치게 된다. 악의 근원이자 알고 보니 사연 있는 악역 역시 뿌리를 뽑힌 존재이기 때문에 업루티드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함축적인 이름이다.


이 소설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주인공 니에슈카가 드래곤의 탑에서 마법사 살칸과 충돌하며 마법을 배우고 친구 카시아의 사고를 계기로 수도로 떠나 정식으로 마녀가 된 후 탑으로 돌아와 우드의 진실을 파헤친다. 종이책 기준으로 676장의 장편이지만 균형을 잘 잡아서 밀도감 있게 진행된다.


소설 첫 부분에 드래곤이라는 호칭이 자꾸 나와 잠깐 낚였지만 용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마법사의 이명(異名)일 뿐이었다. 이 세계관에서 마녀와 마법사는 나이를 먹지 않는 존재이며 마법사 명단에 이름이 오를 때 마법의 언어로 새 이름을 부여받는다. 


사고뭉치이지만 강단 있는 니에슈카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여러 모로 즐겁게 읽었지만 딱 하나 아쉬운 것은 교정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오타가 눈에 많이 띄고 심지어 문장 뒷부분이 통째로 날아간 경우도 있었다. 종이책도 오타가 심하다고 하니 책이 좀 급하게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올 여름에 나오미 노빅의 신작이 하나 더 나온다고 해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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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inrod
Life Log2018. 1. 26. 16:41



"지난 반 세기의 가장 위대한 SF 및 판타지 작가 중 한 명인 어슐러 르 귄의 타계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슬펐습니다.


수년 간 저는 르 귄을 만날 수 있는 영광을 몇 번 가졌지만 진짜 그녀와 아는 사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와 가진 만남은 모두 컨벤션이나 네뷸러 만찬 아니면 작가 워크숍이었고 짧고 잊기 쉬운 만남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잘 알고 있습니다. SF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하죠. 그녀는 거인이었습니다. 축복받은 이야기꾼이자 예술에 헌신한 그녀는 저를 비롯한 후속 세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 생각에 '어둠의 왼손'은 기존의 SF 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이며 '빼앗긴 자들'과 '하늘의 물레' 역시 빼어난 작품입니다. '어스시' 3부작은 판타지의 전당에서 우뚝 솟은 위치를 차지합니다. 비록 TV판이 엉망이긴 하지만요. 


SF의 황금 시대는 보통 어스타운딩(주: 잡지 이름)의 캠벨 시대와 하인라인, 아시모프, 밴보트 거물 3인방으로 여겨집니다. 제게 있어 그 시대만큼이나 중요한 진정한 황금 시대는 항상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일 것입니다. 거물 3인방이 로저 젤라즈니, 사무엘 델라니, 그리고 어슐러 르 귄이었던 시대죠. 우리는 이와 같은 시대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Posted by Finrod